2007년 05월 11일
흐르는 강물같은 음악으로...
휴가를 다녀오면 생활의 활력이 좀 생기고, 매일 매일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곳 동료들의 독특한 스타일에도 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너무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진전이 없는 한 주였다. 구름에 잔뜩 가려져 있던 우기의 태국 하늘의 태양빛으로 조금 그을은 얼굴이 아니라면 9일간의 휴가를 다녀왔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니.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살짝 물러 앉아 있기로 결심한 요즘이란 일이 바빠 숨이 헉헉댈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동감으로 가득차 일하는것도 아닌 날들이다. 이 직장에 들어와서 두번 째 제품 런칭을 그럭저럭 성사시키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제 뭘하나 고민이다. 준비하는 동안 몸의 에너지가 이리로 저리로 소실되어서 막상 런칭 소식을 알릴 때쯤이면 기뻐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상 다 차려 놓으면 그제서야 나서서 어느 자리에 앉아야 주빈으로 보일까, 상위에 오른 요리를 어떻게 장황히 설명해볼까 하는 고민으로 갑자기 바빠진 일단의 무리들을 보면 진짜 치밀어 오는 역겨움. 내가 그렇다고 특별히 독야청청한 것도 아닌데, 기회만 쫓아 바쁜 사람들과는 겸상하기가 싫은 어줍잖은 뻣뻣함은 어쩔수가 없다. 요리할 때 냄새에 질려서 상에 앉기가 싫은 걸수도 있고.
저녁 무렵 사무실을 바람같이 빠져나와, 키스 자렛의 공연장까지 터벅터벅, 실은 예의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일까 달력은 분명 5월인데, 분위기는 스산한 11월을 연상시킨다. 11월에 자주겪곤 하는 바닥을 치는 우울함이 이때다 싶게 고개를 들고, 공연장까지 걷는 30분은 지독히도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시간이 되버린다.
그럭저럭 시간에 맞춰서 자리를 찾아 앉고, Keith 아저씨? 할아버지? 공연을 몇년만에 보는건가 미처 헤아릴 겨를도 없이 시작된 연주.
그 순간 깨닫는다. 내 휴가에서 빠져 있었던 건 음악이구나. 이게 없어서 실컷 잘 놀고 즐기고도 돌아와서 재충전의 느낌이 없는거구나.
세상 볕에 그을리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메마르고 건조해진 내게 무대에서 울려나오는 삼인의 음악은 잠시 쉬어가는 강가다. 악기를 다루는게 아니라, 흐름을 다루고,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는 거장들이 뿜어내는 강물 같은 음들. 한 숨결도 끊어짐이 없고, 격하게 호흡하는 법이 없고, 지나친 법이 없다. 굽이쳐 흐르되 파도로부터 자유롭고, 고여있는 법이 없이 주욱 흘러가는 강물과 이들의 음악은 정말 놀랍도록 닮아 있다.
강물이 될 거대한 운명을 타고나진 못했어도, 이렇게 한번씩 강가에 앉아서 숨을 고르면서, 이런저런 감상에도 젖어보고, 엉터리같은 생각도 얼기설기 짜맞춰 보면서 잠시 쉬어 갈수 있다는 것만도 때론 참 감사한 일이다. 언제나 혼자서 모든걸 헤쳐나가야 하는 거대한 대도시의 하늘아래서라면 더욱.
# by jeepy | 2007/05/11 00:01 | 트랙백 | 덧글(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