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8일
그리움 들춰내기 - 필라델피아
설렘을 품고 도착했던 회색 빛의 도시, 가끔은 찾아왔던 절망감과 빡빡했던 학생으로서의 시간들, 나의 상념과 느린 발걸음을 한껏 품어주곤 했던, 너무 서럽게 파랗던 하늘. 도시 전체에 드리웠던 왠지 모를 우울한 잔상, 자그마하지만 소소한 아름다움과 고풍이 있는 다운 타운, 2차선의 좁은 차선들, 햇빛 고운 날이면 리튼 하우스 스퀘어로 가득히 모여 들던 사람들,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새로 발견했던 맛있는 식당들, 급한거 없이 여유롭지만 그래도 교외에 사는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던 그 도시의 사람들. 그리고, 언제나 도시의 밤을 지켜내던 기묘한 노란 눈동자의 탑.
학교에서 집으로 월넛을 따라 걸어 돌아오던 그 시간을 참 즐겼었는데…
떠난지 3년 반만에 모처럼, 맘먹고 필리에 갔다. 들른다고 해봐야 DC에서 오는 길에 하룻밤 묵는 거니까, 24시간이 채 안되는 거지만, 이른 아침 암트렉을 타고 30가 역에서 내리는데 역사의 높은 천장만 봐도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이 오래된 연인을 만나듯이 설레었다.
비로 온종일 질척이던 날씨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브로드 스트릿의 호텔에 짐을 풀기가 무섭게 월넛 거리를 신나게 가로질러, La Colombe부터 갔다. 브랜드 커피를 마실까 카푸치노를 마실까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일단 아침이니까 카푸치노를 마시고 오후에 한번 또 들리기로 맘먹었다. 아 얼마나 그리워했던 깊은 맛인가.
학교 다닐땐 관심도 없던 각종 기념품 사대느라 북스토어에서 만만치 않은 시간을 잡아먹고 다다른 헌츠만 홀은 정말 한점의 변화도 없는 모습이다. 여전히 다른 건물들에 비해 반짝 반짝한 새건물 냄새, 금요일에도 각종 수업이 있는 강의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스터디 룸. 딱 하나 변한게 있다면 1층 Au Bon Pain 앞에 늘어지게 자라난 나무 덩굴들. 평생 다시 쳐다보지 않기로 한 Au Bon Pain 인데 무성한 덩굴 자락에 어울려 제법 낭만적인 분위기마져 연출하는 통에 하마터면 뭐라도 주문할 뻔했다.
헌츠만 홀이 이정도니 다른 건물과 거리가 한결 같은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월이 여기를 비켜 가는건지, 이미 얽혀있는 세월의 무게로 몇 년의 시간 쯤은 섞여도 전혀 티가 안나는 건지 암튼 캠퍼스 상점가에 새로 생긴 Cereal Bar가 겨우 하나 집어 낼 수 있는 변화인 거다.
학생들만 갈아치운 듯한 캠퍼스에 비하면 그래도 다운타운은 제법 바람직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게 확연했다. 멋진 초고층 건물이 두개나 생겼고, 월넛과 체스넛에는 West Elm, Bo Concept, DWR같은 내가 좋아하는 인테리어 가구점이 좌악 들어서고, 자라나 세포라, 로우만스 같은 필수 불가결한 상점들도 차곡 차곡 들어온 거다. Di Brunos Brother나 Scoop De Ville 아이스크림집은 확장 이전을 했고.
뉴욕에서 필리로 다시 이사온 Jing 부부와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했다. 처음 가본 식당이지만, 먹거리의 도시 필리 답게 역시 녹녹치 않은 맛을 자랑하는 것이, 한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그리운 식당 다시 가보기 뭐 이런거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 졌다. 13가 Samson 젤라토 집에서 사온 디저트와 차 한 주전자를 놓고 친구집에서 밤이 새도록 떨던 수다는 왜 그렇게 또 새록 새록 하던지. 중국과 인도 출신의 이 천재 물리학 박사 부부는 일상적인 대화 중에도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현재순가치로 환원할까, 국가별 범죄율과 납이나 수은 노출과의 상관관계는 어떤가 등등 대단히 무게 있는 화제를 쉴새 없이 날린다. 아마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 아빠 토론을 어깨 너머로 구경만 해도 학교도 가기 전에 꼬마 박사가 되어 있을 듯.
다음에 필리를 가보는 건 언제가 될까? 졸업 5주년 기념여행 아니면 또 이런 식으로 툭툭 지나가며 들르기?
<Day & Night : 노란 시계탑>
고담시티는 뉴욕이 아니라 필리여야해 라고 늘 주장하게 만들었던 살짝 괴기스러운 노란 눈동자 시계탑은 여전하다. 거기다 얼마전 읽은 Historian에서 마지막에 드라큘라가 아직도 배회하는 도시로 필라델피아가 나온 기억에다 마침 근처 극장에서는 오페라 드라큘라를 공연중.
부슬거리는 밤비속의 시계탑은 하지만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다른 힘도 지녔다.

일전에 우연히 필리에서 왔다는 사람과 친구네 파티에서 La Colombe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두고 설전을 벌인 끝에 이게 사실 프랑스풍의 커피점이라는걸 뒤늦게 알게된 후로 더욱 그리워했던 Colombe, Colombe, Colombe... 이날 아침에 마신 카푸치노도 오후에 마신 블랙 커피도 아직 혀에서 감도는 듯 하다.





# by jeepy | 2007/10/28 20:32 | 트랙백 | 덧글(9)




